건강담론이 여성의 생활을 통제하는 방식은 출산과 연결되면 더 가관이다. 여성을 아이 낳을 몸으로 규정해 버린다는 문제는 오만팔만번 양보해서 일단은 그냥 넘어가 보자. 여성의 나이가 많아질수록 유전적으로 장애가 있는 아이를 출산할 가능성이 높다는, 거의 기정사실화 되어버린 통념은 어떤가. 고등학교 생물시간에는 분명히 엄마의 몸에서 나온 유전자 n과 아빠의 몸에서 나온 유전자 n이 양적으로 동일하게 만나 2n인 개체가 탄생한다고 배웠다. 게다가 의학이 그렇게 좋아하는 통계적으로 보면, 엄마의 연령보다는 아빠의 연령이 높은 경우가 더 많다. 그런데 왜 출산에 관련된 문제는 다 엄마의 탓인 것일까? 게다가 이런 통념에는 장애가 있는 아이는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극도로 위험한 전제까지 깔려 있어서 더욱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p.10)
"할아버지들은 담배피우고 술 마시면서 스트레스라도 풀지만 할머니들은 그럴 기회가 없어서 판피린을 복용함으로써 해소한다." 판피린을 장기과다복용하는 사람은 대부분 중장년층 여성인데 왜 그런 것 같냐는 질문에 약사는 저렇게 대답했다. 판피린은 감기약인데 그 여성들은 어떤 통증에도 무조건 '만병통치약'처럼 판피린을 사용한다는 대답도, 수업 발표를 위해 현장조사를 하며 들른 여러 약국에서 이어졌다. 나는 그 말들에 드라이아이스에 손을 댄 듯 가슴이 서늘해졌다. 나는 그녀들과 닮은 또 하나의 얼굴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당신들의 엄마이다.
[판피린 -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바로 구매할 수 있는 일반 의약품으로 분류되는 액상감기약. "감기 조심하세요~!"를 외치는 판피린걸이 등장하는 광고로 많이 알려졌다.] (p.14)
돌보는 사람은 아플 수가 없다. 마음껏 아플 수 있는 환자 역할은 아무나 취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엄마는 '너네들' 그러니까 '가족들' 키우느라, 먹여살리느라, 때문에 아프거나 아플 수 없다. 결국 엄마가 아프다고 말하는 것과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같은 동전의 앞/뒷면일 뿐이다. (p.15)
의사가 똑같은 증상에 대해 남성 환자에게는 '뉴런 신경계통의 문제이다'라는 과학적 언어를 부여하면서 여성 환자에게는 '심리적 문제다. 집에 가서 쉬어라.'라는 진단을 내리는 사례에 관한 이야기를 '건강과 질병의 사회학'이란 수업시간에 들었다. 이처럼 여성의 고통에는, 엄마의 고통에는 언제나 심리적, 정신적 문제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중략…) 역사적으로 여성건강에 대한 연구는 언제나 모성보호의 가치에 입각한 생식 및 산부인과 관련 질환에만 치중되어 왔고, 다른 일반 질병에 관한 연구는 언제나 남성의 신체와 그들의 환경, 조건을 기준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의료계의 전문가 권위는 죄다 남성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들은 이와 같은 기분을 더욱 심화시키는 물증이다. (pp.17-18)
나는 A와 B와 C를 만나오면서 '건강'은 일종의 '의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발전하면서, 채찍 대신 '자기 관리'라는 좀더 '세련된 채찍질'을 연마한다. 건강이 개인이 챙겨야 되는, 노동력이자 자원이라는 인식은, 이러한 세련된 채찍질이 아닌가? 그리고 이 세련된 채찍질의 효과는, 바로, 건강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여,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 대한 질문을 원천봉쇄한다는 것이다. (p.40)
출처 : 서울대 여성주의 자치언론 쥬이쌍스 2007년 21호, 기획/ 건강 中
- 고릴라 걸, 건강이 증명하는 것
"할아버지들은 담배피우고 술 마시면서 스트레스라도 풀지만 할머니들은 그럴 기회가 없어서 판피린을 복용함으로써 해소한다." 판피린을 장기과다복용하는 사람은 대부분 중장년층 여성인데 왜 그런 것 같냐는 질문에 약사는 저렇게 대답했다. 판피린은 감기약인데 그 여성들은 어떤 통증에도 무조건 '만병통치약'처럼 판피린을 사용한다는 대답도, 수업 발표를 위해 현장조사를 하며 들른 여러 약국에서 이어졌다. 나는 그 말들에 드라이아이스에 손을 댄 듯 가슴이 서늘해졌다. 나는 그녀들과 닮은 또 하나의 얼굴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당신들의 엄마이다.
[판피린 -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바로 구매할 수 있는 일반 의약품으로 분류되는 액상감기약. "감기 조심하세요~!"를 외치는 판피린걸이 등장하는 광고로 많이 알려졌다.] (p.14)
돌보는 사람은 아플 수가 없다. 마음껏 아플 수 있는 환자 역할은 아무나 취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엄마는 '너네들' 그러니까 '가족들' 키우느라, 먹여살리느라, 때문에 아프거나 아플 수 없다. 결국 엄마가 아프다고 말하는 것과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같은 동전의 앞/뒷면일 뿐이다. (p.15)
의사가 똑같은 증상에 대해 남성 환자에게는 '뉴런 신경계통의 문제이다'라는 과학적 언어를 부여하면서 여성 환자에게는 '심리적 문제다. 집에 가서 쉬어라.'라는 진단을 내리는 사례에 관한 이야기를 '건강과 질병의 사회학'이란 수업시간에 들었다. 이처럼 여성의 고통에는, 엄마의 고통에는 언제나 심리적, 정신적 문제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중략…) 역사적으로 여성건강에 대한 연구는 언제나 모성보호의 가치에 입각한 생식 및 산부인과 관련 질환에만 치중되어 왔고, 다른 일반 질병에 관한 연구는 언제나 남성의 신체와 그들의 환경, 조건을 기준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의료계의 전문가 권위는 죄다 남성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들은 이와 같은 기분을 더욱 심화시키는 물증이다. (pp.17-18)
- 고양이구름, 엄마의 건강
나는 A와 B와 C를 만나오면서 '건강'은 일종의 '의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발전하면서, 채찍 대신 '자기 관리'라는 좀더 '세련된 채찍질'을 연마한다. 건강이 개인이 챙겨야 되는, 노동력이자 자원이라는 인식은, 이러한 세련된 채찍질이 아닌가? 그리고 이 세련된 채찍질의 효과는, 바로, 건강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여,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 대한 질문을 원천봉쇄한다는 것이다. (p.40)
- 투덜이염소, '건강권' 꼼꼼히 보기
출처 : 서울대 여성주의 자치언론 쥬이쌍스 2007년 21호, 기획/ 건강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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